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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자유로부터의 도피

by 졔베 2021. 11. 10.

자유로부터의 도피

대학시절 들었던 현대철학 수업에서 교수님은 에리히 프롬을 첫번째 철학자로 소개해 주셨다. 중세에서 벗어나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개인이 겪게되는 심리적 변화를 재미나게 설명해 주셨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내가 그 수업을 정말 좋아했나 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와 [사랑의 기술]로도 잘 알려져 있는 사회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이고 철학자이다. [소유냐 존재냐]도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만 하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에리히 프롬의 다른 책들도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북으로 책을 읽는 내내 밑줄을 긋느라 진도가 더뎠다. 한줄 한줄 밑줄을 치지 않을 수 없는 통찰력 있는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어떻게 에리히 프롬은 그 시절에 이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 졌다.

 

이 책은 1941년에 출간 되었고, 그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에리히 프롬이 나치와 독일 국민을 분석하게 된 것도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이 책을 통해 나치와 나치에 동조한 독일 국민들의 정신과 심리를 분석하면서 모든 인간(=개인)의 근본적인 외로움과 고독의 근원을 설명한다. 에리히 프롬 덕분에 한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서도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외로움과 고독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여기서 부터는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사회 과정의 역학을 이해하려면, 개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심리적 과정의 역학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개인을 이해하려면 그 개인을 형성하는 문화를 배경으로 그를 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주제를 간단히 요약하면, 근대인은 개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개인을 속박하던 전 개인주의 사회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 즉 개인의 지적, 감정적, 감각적 잠재력의 표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직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 고립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개인이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중략) 왜냐하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전체주의적 경향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전체주의 세력을 극복하려는 모든 행위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토록 강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 자의식, 다시 말하면 자신을 자연이나 타인과는 다른 별개의 실체로 의식하는 사고 능력이다. 다음 장에서 지적하겠지만, 이 의식의 정도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자의식의 존재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인간은 자신을 자연이나 타인과는 별개의 존재로 의식하고, 죽음과 질병과 노화를 -아주 막연하게나마- 의삭하면, '그'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이나 우주와 비교하여 자신이 너무나 하찮고 작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는 어딘가에 속해있지 않으면, 그의 삶이 어떤 의미와 방향도 갖지 않으면, 자신이 한낱 티끌처럼 느껴질 것이고, 개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느낌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그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줄 어떤 체제와도 자신을 결부시킬 수 없을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심은 결국 그의 행동 능력, 즉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킬것이다. (중략)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한편으로는 외적 권위로부터 벗어나 차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점점 고립되어 결국 자신을 하찮고 무력한 존재로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그들은 경제 활동과 부를 통해 자유를 느끼고 개성을 의식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무언가를 잃었다. 그것은 중세의 사회 구조가 제공했던 안전감과 소속감이었다. 그들은 이제 더 자유로웠지만, 더 외롭기도 했다. (중략) 모든 인간관계는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한 이 사느냐 죽느냐의 격렬한 투쟁에 오염되었다. 동료들, 또는 적어도 자신과 같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냉소적이고 초연한 태도로 바뀌었다. 타인들은 이용하고 조종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목적을 위해서는 타인을 무자비하게 말살했다. 개인은 격렬한 자기중심주의, 권력과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사로잡혔다. 그 결과 성공한 개인이 자신과 맺는 관계, 그의 안전감과 자신감도 해로운 영향을 받았다. 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아도 그에게는 조종 대상이었다. 르네상스 자본주의의 유력한 주인공들이 흔히 묘사되는 것만큼 행복하고 안전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 새로운 자유는 그들에게 두가지를 가져다 준 것 같다. 하나는 힘이 더 강해졌다는 느낌이고, 그와 동시에 고독과 의심과 회의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결과인- 불안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렇게 키워져 학교에 들어가고, 아마 대학에도 갈 것이다. 나는 오늘날 쓰이는 교육 방법 가운데 독창적인 생각을 실제로 방해하는 몇 가지를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지식, 아니 그보다는 정보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을 많이 알수록 현실도 잘 알 수 있다는 한심한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산발적인 사실 수백개를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한다. 학생들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기 때문에 생각할 짬이 없어진다. 물론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허구적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 만큼이나 생각을 방해할 수 있다.

 

독창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모든 진실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실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누군가가 진실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하면 오늘날의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그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문제, 거의 취향에 따른 문제라고 주장된다. 과학적인 노력은 주관적인 요소에서 분리되어야 하고, 그 노력의 목적은 열정이나 관심을 배제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자는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접근할 때처럼 손을 소독하고 사실에 접근해야 한다. 상대주의는 경험주의나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단어의 정확한 용법에 관심이 많다고 스스로 자랑하기도 하지만, 이 상대주의의 결과는 생각이 그 본질적인 자극 - 생각하는 사람의 소망과 관심 - 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대신 생각은 '사실'을 기록하는 기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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